처분이 "처음부터" 무효가 되려면 — 행정기본법 제15조 단서와 중대·명백 기준

입력 2026.10.22. 오전 10:08

결론부터

행정기본법 제15조는 본문에서 “처분은 권한이 있는 기관이 취소 또는 철회하거나 기간의 경과 등으로 소멸되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으로 통용된다”고 정하면서도, 단서에서 “다만, 무효인 처분은 처음부터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아니한다”고 따로 규정한다. 즉 하자가 있어도 일단은 ‘통용’되는 처분과, 통용의 적용을 아예 받지 않고 처음부터 효력이 없는 처분을 구분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조문 자체는 ‘유효한 것으로 통용된다’는 효과만 정할 뿐, 단서의 ‘무효’가 되려면 어떤 하자가 있어야 하는지는 정하지 않는다. 그 기준을 제시한 것이 대법원 1995. 7. 11. 선고 94누4615 판결이다. 다수의견은 “하자 있는 행정처분이 당연무효가 되기 위하여는 그 하자가 법규의 중요한 부분을 위반한 중대한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이어야 하며,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한 것인지 여부를 판별함에 있어서는 그 법규의 목적, 의미, 기능 등을 목적론적으로 고찰함과 동시에 구체적 사안 자체의 특수성에 관하여도 합리적으로 고찰함을 요한다”고 했다. 이른바 ‘중대·명백설’이다.

통용과 무효는 어떻게 다른가

행정기본법 제15조의 구조를 다시 짚으면 이렇다.

  • 본문(원칙): 처분은 권한이 있는 기관이 취소 또는 철회하거나, 기간의 경과 등으로 소멸되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으로 통용된다.
  • 단서(예외): 무효인 처분은 이 통용 자체를 적용받지 않고, 처음부터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아니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본문의 ‘통용’은 그 처분이 적법하다는 인정이 아니다. 위법한 처분이라도 권한 있는 기관이 취소·철회하거나 기간 경과 등으로 소멸되기 전까지는 일단 효력이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는 뜻이지, 그 처분의 적법성을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통용이 끝나는 사유는 조문상 ‘권한이 있는 기관’의 취소·철회 또는 ‘기간의 경과 등으로 소멸’ 두 가지로 한정돼 있다. 처분을 받은 당사자가 스스로 효력을 부정하거나, 아무 기관이나 임의로 효력을 없앨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제15조는 취소·철회의 효력이 언제부터(장래 또는 소급) 미치는지는 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단서가 적용되는 ‘무효인 처분’은 애초에 통용 자체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취소·철회라는 별도의 행위 없이도 처음부터 효력이 없다는 것이 조문의 구조다. 다만 어떤 하자가 ‘무효’에 해당하는지는 제15조가 아니라 판례 법리로 보충된다.

무효 판단의 기준 — “중대”와 “명백”을 같이 요구

94누4615 판결의 사안은 건설업 영업정지처분에 관한 것이었다. 건설부장관의 영업정지 등 처분권한은 법령에 따라 시·도지사에게 위임되었는데, 시·도지사가 이를 다시 구청장에게 재위임하면서 규칙이 아니라 조례로 정했다. 대법원은 이 재위임 조례가 기관위임사무를 조례로 정한 것이어서 무효라고 보았다. 문제는 그 무효인 조례에 근거해 구청장이 내린 영업정지처분까지 당연무효인가였다.

다수의견은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 처분청(구청장)에게 적법한 위임 없이 처분 권한이 없었다는 점에서 하자는 중대하다.
  • 그러나 조례와 규칙의 상위·하위 관계, 헌법 제107조 제2항의 ‘규칙’ 개념이 경우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이 위임 과정의 하자가 객관적으로 명백하다고 할 수는 없다.
  • 따라서 이 하자는 **“중대할 뿐 명백한 것은 아니”**므로 당연무효 사유가 아니고, 취소를 구할 수 있는 하자에 그친다.

그 결과 대법원은 이 영업정지처분을 당연무효로 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심법원으로 환송했다. 즉 “권한 없는 자가 한 처분이니 곧 무효”라는 식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것이 이 판결의 핵심이다. 하자가 아무리 중대해도 그것이 일반인의 입장에서 외관상 명백하지 않다면, 다수의견의 틀에서는 무효가 아니라 취소사유에 머문다.

다만 같은 판결에는 반대의견도 있었다는 점을 함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반대의견은, 명백성이라는 요건은 처분을 유효한 것으로 믿은 제3자나 공공의 신뢰를 보호할 필요가 있을 때 보충적으로 요구되는 것이고, 그런 보호 필요가 크지 않거나 하자가 워낙 중대해 권익 구제의 필요가 더 큰 경우라면 명백성이 없어도 무효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소수의견이고, 다수의견은 중대성과 명백성을 함께(둘 다) 요구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두 의견을 섞어서 이해하면 안 된다.

무효로 확인받으려면 — 소송 요건의 문제

하자가 중대·명백해 처분이 처음부터 무효라고 다투려는 사람은 행정소송법상 무효등 확인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행정소송법 제35조는 “무효등 확인소송은 처분등의 효력 유무 또는 존재 여부의 확인을 구할 법률상 이익이 있는 자가 제기할 수 있다”고 정한다. 여기서 ‘법률상 이익’은 아무에게나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처분의 근거 법률에 의하여 보호되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익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대법원 2008. 3. 20. 선고 2007두6342 판결은 이와 관련해 중요한 판례 변경을 했다. 종전에는 처분의 무효를 전제로 한 부당이득반환청구 등 이행소송 같은 다른 구제수단이 있으면 무효확인소송의 소의 이익을 부정해 왔는데(이른바 ‘무효확인소송의 보충성’), 이 판결은 이러한 보충성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견해를 변경했다. 그 이유로는 ① 무효확인소송도 항고소송의 일종으로 행정소송법에 규정돼 있고, ② 처분을 취소하는 확정판결의 기속력·재처분 의무 규정이 무효확인소송에도 준용되어 무효확인판결 자체만으로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③ 우리 행정소송법에는 보충성을 명시한 규정이 없다는 점 등을 들었다. 따라서 처분의 무효를 전제로 한 이행소송 등 다른 직접적 구제수단이 있는지 여부는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현재의 법리다.

다만 이 두 판결을 참조할 때 짚어 둘 점이 있다. 94누4615의 참조조문은 구 건설업법과 행정소송법 제1조·제19조 등이고, 2007두6342의 참조조문은 행정소송법 제35조다. 두 판결 모두 행정기본법 제15조를 직접 해석한 판례는 아니다. 제15조는 ‘통용’과 ‘무효’의 관계를 명문화한 조문이고, 무효의 실질적 판단 기준(중대·명백)과 무효확인소송의 요건(법률상 이익, 보충성 불요)은 각각 별개의 판례 법리로 형성돼 온 것이라는 점을 구분해 이해해야 한다.

정리

  • 처분은 원칙적으로 취소·철회되거나 기간 경과 등으로 소멸되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으로 통용되지만(행정기본법 제15조 본문), 무효인 처분은 이 통용의 적용을 받지 않고 처음부터 효력이 없다(같은 조 단서).
  • 어떤 하자가 ‘무효’에 해당하는지는 제15조가 직접 정하지 않고, 판례상 하자가 법규의 중요한 부분을 위반한 중대한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명백할 것을 요구하는 중대·명백설(대법원 1995. 7. 11. 선고 94누4615 판결 다수의견)이 기준으로 제시돼 있다. 하자가 중대하기만 하고 명백하지 않으면 당연무효가 아니라 취소사유에 그칠 수 있다.
  • 처분이 무효라고 다투려면 행정소송법 제35조에 따라 ‘법률상 이익’이 있는 자가 무효등 확인소송을 제기해야 하고, 다른 구제수단(이행소송 등)이 있는지는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현재 대법원의 입장(대법원 2008. 3. 20. 선고 2007두6342 판결)이다.

참고 법령·조문

  • 행정기본법 제15조(처분의 효력)
  • 행정소송법 제35조(무효등 확인소송의 원고적격)
  • 대법원 1995. 7. 11. 선고 94누4615 판결 (참조조문: 구 건설업법 제50조 제2항 제3호·제57조 제1항, 건설업법시행령 제53조 제1항 제1호, 정부조직법 제5조 제1항, 지방자치법 제9조·제93조·제95조, 행정권한의위임및위탁에관한규정 제4조, 행정소송법 제1조·제19조)
  • 대법원 2008. 3. 20. 선고 2007두6342 판결 (참조조문: 행정소송법 제35조, 구 하수도법 제32조 제2항)

관련 법령: 행정기본법 제15조 · 행정소송법 제35조

관련 판례

대법원 94누4615 — 대법원 1995. 7. 11. 선고 94누4615 판결

가. 구 건설업법(1994.1.7. 법률 제472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7조 제1항, 같은법시행령 제53조 제1항 제1호에 의하면 건설부장관의 권한에 속하는 같은 법 제50조 제2항 제3호 소정의 영업정지 등 처분권한은 서울특별시장·직할시장 또는 도지사에게 위임되었을 뿐 시·도지사가 이를 구청장·시장·군수에게 재위임할 수 있는 근거규정은 없으나, 정부조직법 제5조 제1항과 이에 기한 행정권한의위임및위탁에관한규정 제4조에 재위임에 관한 일반적인 근거규정이 있으므로 시·도지사는 그 재위임에 관한 일반적인 규정에 따라 위임받은 위

판결문 원문 (1995-07-11 선고)

대법원 2007두6342 — 대법원 2008. 3. 20. 선고 2007두6342 판결

[1] 행정소송은 행정청의 위법한 처분 등을 취소·변경하거나 그 효력 유무 또는 존재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국민의 권리 또는 이익의 침해를 구제하고 공법상의 권리관계 또는 법 적용에 관한 다툼을 적정하게 해결함을 목적으로 하므로, 대등한 주체 사이의 사법상 생활관계에 관한 분쟁을 심판대상으로 하는 민사소송과는 목적, 취지 및 기능 등을 달리한다. 또한 행정소송법 제4조에서는 무효확인소송을 항고소송의 일종으로 규정하고 있고, 행정소송법 제38조 제1항에서는 처분 등을 취소하는 확정판결의 기속력 및 행정청의 재처분 의무에 관한 행정소송법

판결문 원문 (2008-03-20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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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한 1차 출처

최종 확인일: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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