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계좌라는 형식이 아니라 신임의 성질을 본다 — 대법원 2025도13722이 그은 선
한 줄 요약
대법원은 2026년 6월 25일 선고한 2025도13722 판결(사건명 횡령)에서, 위탁자가 채무초과 상태에서 차명계좌를 이용했다는 사정만으로는 그 재물 위탁행위를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결론은 파기환송이다. 무죄가 확정된 것이 아니다.
핵심 정리
- 횡령죄의 ‘보관’은 위탁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위탁관계는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으로 한정된다(판시 [1], 적극).
- 약정 등 법률행위에 근거해 위탁관계가 설정된 경우, 그 신임의 보호가치를 부정하려면 형사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전체 법질서상 허용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판시 [2], 적극). 문턱이 높다는 뜻이다.
- 차명계좌에 돈을 보관하되 명의인은 임의로 쓰지 않기로 약정한 사안에서, 채무초과 상태에서 차명계좌를 이용했다는 사정만으로는 그 위탁행위를 강제집행면탈죄의 실행행위 등과 같은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 볼 수 없다(판시 [3], 소극).
- 「형법」 제355조 제1항 횡령의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 이 판결이 판단한 것은 횡령죄의 성립 여부에 한정된다. 차명계좌 이용 자체가 적법하다고 선언한 판결이 아니다.
사건의 유형: 명의만 남의 것인 계좌
돈을 자기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 이름의 예금계좌에 넣어두는 일이 있다. 이른바 차명계좌다. 계좌의 명의는 수탁자(명의인)의 것이지만, 실제로 그 돈을 넣고 관리하는 사람은 위탁자다. 이때 위탁자와 명의인 사이에 “이 돈은 네 것이 아니니 임의로 쓰지 않는다”는 약정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명의인이 그 약정을 어기고 계좌의 돈을 자기 용도로 써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민사적으로 돌려달라고 다투는 것과 별개로, 형사상 횡령죄가 성립하는지가 문제된다.
여기서 반론이 나온다. “애초에 위탁자가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 재산을 남의 이름 뒤에 숨겨둔 것 아니냐. 그런 목적의 맡김까지 형법이 보호해 줘야 하느냐”는 것이다. 대법원 2025도13722 판결이 다룬 지점이 정확히 이 대목이다.
갈림길은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인가’다
「형법」 제355조 제1항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를 횡령죄의 주체로 정한다. 그래서 명의인이 그 돈을 ‘보관하는 자’에 해당하는지가 출발점이 된다.
판시사항 [1]의 원문은 이렇다.
횡령죄에서 말하는 ‘보관’의 의미 / 횡령죄의 성립에 필요한 위탁관계는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으로 한정되는지 여부(적극)
‘적극’은 그렇다는 뜻이다. 즉 사실상 돈이 그 계좌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횡령죄의 ‘보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형사법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신임관계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이 구도가 중요한 이유는, 판단의 초점이 ‘차명계좌’라는 형식이 아니라 위탁관계의 성질에 놓인다는 데 있다. 계좌 명의가 누구 것이냐가 아니라, 그 맡김이 형법으로 지켜줄 만한 신뢰였느냐를 본다.
문턱: ‘전체 법질서상 허용하기 어려운 정도’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보호가치가 부정되는가. 판시사항 [2]의 원문이다.
재물의 보관에 관한 위탁관계 설정이 약정 등 법률행위에 근거한 경우, 그 위탁관계가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 위해서는 그 위탁관계를 형사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전체 법질서상 허용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지 여부(적극)
여기서도 답은 ‘적극’이다. 보호가치를 걷어내려면 단순히 “떳떳하지 못한 사정이 있다” 정도로는 부족하고, 그 위탁관계를 형사법으로 보호하는 것 자체가 전체 법질서상 허용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문턱을 높게 잡은 것이다. 약정에 근거해 맺어진 위탁관계는 원칙적으로 보호 범위 안에 있고, 그 밖으로 밀어내려면 상당한 정도의 사정이 필요하다는 구조다.
‘그 사정만으로는’ — 대법원이 붙인 한정
이 판결에서 가장 오독되기 쉬운 부분이 판시사항 [3]이다. 원문 그대로 옮긴다.
위탁자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개설된 예금계좌(이른바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금융거래를 하면서 그 차명계좌에 돈을 보관하되 계좌 명의인인 수탁자는 이를 임의로 사용하지 않기로 하는 약정을 체결한 경우, 위탁자가 채무초과 상태에서 차명계좌를 이용하였다는 사정만으로 그 약정에 따른 재물 위탁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의 실행행위 등과 같이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소극) / 이때 차명계좌에 보관된 돈의 위탁행위가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
핵심은 **“사정만으로”**라는 한정이다.
대법원이 말한 것은 “채무초과 상태 + 차명계좌 이용”이라는 두 가지 사정이 붙어 있다는 그것만 가지고는 위탁행위를 범죄 실현의 수단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차명계좌에 맡긴 돈은 언제나 형법의 보호를 받는다”로 읽으면 판결을 정반대로 오해하는 셈이 된다.
판시사항 후단이 그 점을 분명히 한다. 대법원은 “이때 차명계좌에 보관된 돈의 위탁행위가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을 함께 제시했다. 즉 다른 사정들이 더해져 그 위탁 자체가 범죄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는 사안이라면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이 판결은 ‘한 가지 사정만으로 단정하지 말라’는 판단 방법에 관한 것이지, 차명계좌 일반에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다.
오해하기 쉬운 지점 세 가지
첫째, 이 판결은 차명계좌 이용이 적법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판단 대상은 명의인이 그 돈을 임의로 쓴 행위에 횡령죄가 성립하는지였다. 차명 금융거래는 금융 관련 법률 등 다른 법률에서 별도로 규제될 수 있고, 그 부분은 이 판결이 다룬 쟁점이 아니다. 이 글도 차명계좌 이용을 권하거나 정당화하는 취지가 전혀 아니다.
둘째, 무죄가 확정된 사건이 아니다. 이 판결의 결론은 파기환송이다. 대법원이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보아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는 뜻이며, 환송 후 절차에서 사실관계와 법리가 다시 판단된다. 특정 사건의 유무죄를 미리 단정할 수 없다.
셋째, 「형법」 제355조의 법정형은 그대로다. 사기죄(제347조)의 벌금 상한이 상향된 개정을 두고 횡령죄의 형도 같이 올라간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355조는 그 개정과 무관하다. 제355조의 최종 개정은 1995년 12월 29일이다.
조문 확인: 「형법」 제355조
제355조(횡령, 배임) ①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그 반환을 거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②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도 전항의 형과 같다.
제355조는 두 개의 항으로 되어 있고, 항 아래에 호나 목은 없다. 제1항이 횡령, 제2항이 배임이다. 제2항의 배임죄는 “전항의 형과 같다”고 정하고 있으므로 법정형은 제1항과 같다.
문언에서 두 가지를 짚어둘 만하다. 하나는 주체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라는 점이다. 이 ‘보관’의 의미를 위탁관계와 연결해 풀어낸 것이 이번 판시 [1]이다. 다른 하나는 행위 유형이 “횡령하거나 그 반환을 거부한 때” 두 갈래라는 점이다. 맡은 돈을 써버리는 경우뿐 아니라 돌려주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조문에 함께 규정되어 있다.
자주 묻는 질문
다른 사람 계좌에 맡긴 돈을 명의자가 쓰면 횡령인가요
「형법」 제355조 제1항의 횡령죄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를 주체로 하므로, 명의자가 그 돈의 ‘보관자’에 해당하는지가 먼저 문제된다. 대법원 2025도13722 판결은 횡령죄의 성립에 필요한 위탁관계가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으로 한정된다”고 판시했다(판시 [1], 적극). 즉 돈이 그 계좌에 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동으로 결론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맡김의 바탕에 형사법이 보호할 만한 신임관계가 있었는지를 따진다. 개별 사안의 결론은 약정의 내용과 위탁의 경위 등 구체적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 글에서 미리 단정할 수 없다.
차명계좌에 넣어둔 돈도 법으로 보호받나요
이 판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채무초과 상태에서 차명계좌를 이용했다”는 그 사정만으로는 위탁행위가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판시 [3], 소극). 이것은 ‘차명계좌라면 언제나 보호된다’는 뜻이 아니다. 대법원은 그 위탁행위가 범죄 실현의 수단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도 함께 제시했고, 보호가치를 부정하려면 그 위탁관계를 형사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전체 법질서상 허용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보았다(판시 [2], 적극). 문턱이 높지만, 넘어설 수 없는 문턱은 아니라는 구조다. 또한 이 판단은 횡령죄 성립 여부에 관한 것일 뿐이고, 차명 금융거래가 다른 법률에서 별도로 규제되는지는 이 판결이 다룬 문제가 아니다.
빚이 많아 남의 계좌에 돈을 보관했는데 돌려받을 수 있나요
개별 사안에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는 이 글에서 판단하거나 계산해 줄 수 없다. 다만 이 판결의 법리만 정리하면, 채무초과 상태였다는 사정 하나만으로 그 위탁행위가 곧바로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판시의 내용이다(판시 [3], 소극). 반대로 그 사정에 다른 사정들이 더해져 위탁 자체가 범죄를 실현하는 수단이었다고 평가될 여지도 판결이 열어두고 있다. 그리고 형사상 횡령죄의 성립 여부와, 민사상 반환을 구할 수 있는지는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다. 이 판결은 앞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 판결로 사건이 끝난 건가요
아니다. 이 판결의 결론은 파기환송이다. 사건은 다시 심리된다. 대법원 판시사항이 제시한 것은 판단의 기준이며, 그 기준을 구체적 사실관계에 적용한 최종 결론은 환송 후 절차에서 가려진다.
횡령죄 형이 사기죄처럼 올라갔나요
「형법」 제355조 제1항의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제355조의 최종 개정은 1995년 12월 29일이며, 사기죄(제347조)의 상향과는 무관하다.
이 판결에서 남는 것
정리하면 순서는 이렇다. 첫째, 횡령죄의 ‘보관’은 보호할 가치 있는 신임에 기초한 위탁관계를 전제로 한다. 둘째, 약정에 근거한 위탁관계의 보호가치를 부정하려면 전체 법질서상 허용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셋째, 채무초과 상태에서 차명계좌를 썼다는 사정만으로는 그 문턱을 넘지 않는다.
차명계좌라는 겉모습에 곧바로 결론을 붙이지 말고 위탁관계의 성질을 따져보라는 것, 그리고 그 성질을 부정할 때는 근거가 그만큼 무거워야 한다는 것. 대법원이 이번에 그은 선은 여기까지다. 그 선 바깥의 문제, 즉 차명 금융거래 자체에 대한 다른 법률의 규율은 이 판결과 별개로 남아 있다.
참고 법령·판례
법령
- 「형법」 제355조(횡령, 배임) 제1항 —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의 횡령·반환거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 (개정 1995. 12. 29.)
- 「형법」 제355조(횡령, 배임) 제2항 — 배임, 전항의 형과 같음
- 「형법」 제347조(사기) — 본문에서는 제355조와의 구별을 위해 죄명만 언급했다. 조문 원문은 이 글에서 확인하지 않았다.
판례
- 대법원 2026. 6. 25. 선고 2025도13722 판결 (사건명: 횡령, 결론: 파기환송) — 판시사항 [1] 횡령죄의 ‘보관’의 의미 및 위탁관계의 한정, [2] 보호가치 부정의 기준, [3] 차명계좌 이용과 채무초과 사정만으로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 볼 수 있는지
본문에서 확인하지 못한 사항
- 판시사항 [3]에 언급된 강제집행면탈죄의 조문 번호와 원문은 이 글에서 확인하지 않았다. 판시사항 인용 범위 안에서만 언급했다.
- 환송 후 절차의 진행 경과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글은 공개된 법령 조문과 대법원 판시사항을 정리한 일반적인 정보이며, 특정 사건의 유무죄나 개별 사안의 법률적 결론을 판단한 것이 아니다.
작성: 법률브리프 편집팀
관련 판례
사건명은 「횡령」이고 결론은 파기환송이다. 판시사항 [1]은 횡령죄에서 말하는 '보관'의 의미와, 횡령죄의 성립에 필요한 위탁관계가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으로 한정되는지 여부를 적극으로 본 것이다. 판시사항 [2]는 재물의 보관에 관한 위탁관계 설정이 약정 등 법률행위에 근거한 경우, 그 위탁관계가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보려면 그 위탁관계를 형사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전체 법질서상 허용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지 여부를 적극으로 본 것이다. 판시사항 [3]은 위탁자가 채무초과 상태에서 차명계좌를 이용하였다는 사정만으로 그 약정에 따른 재물 위탁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의 실행행위 등과 같이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를 소극으로 본 것이다. '그 사정만으로'라는 한정이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