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준 통장에 들어온 피해금을 빼 쓰면 사기범 돈을 가로챈 건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사기에 이용된 계좌의 명의인이 들어온 피해금을 영득할 의사로 인출했다면, 일정한 전제 아래 사기범이 아니라 송금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기범에게서 돈을 가로챘다는 의미의 횡령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 대법원 다수의견입니다.
대법원 2018. 7. 19. 선고 2017도17494 판결은 이러한 경우 횡령의 상대방을 누구로 볼 것인지 판단했습니다.
핵심: 피해자를 위하여 보관하는 지위가 될 수 있습니다
형법 제355조 제1항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반환을 거부한 경우를 처벌합니다. 법문에 위탁관계라는 표현이 직접 들어 있지는 않지만, 대법원은 횡령죄의 ‘보관’을 위탁관계에 따른 점유로 해석합니다.
위탁관계는 꼭 계약으로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의 관계, 법률 규정, 관습, 조리 또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인정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형법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관계인지, 돈이 입금된 경위와 보관 상태를 유지할 의무가 있는지 등을 규범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대법원 다수의견은 사기이용계좌에 피해금이 송금된 경우에도 계좌명의인이 피해자와 아무 법률관계 없이 입금된 돈을 반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계좌명의인은 피해자를 위하여 그 피해금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고, 이를 영득할 의사로 인출하면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기범의 돈을 가로챈 횡령은 아니라는 판단
계좌의 접근매체를 사기범에게 넘겼더라도, 계좌명의인은 은행에 대한 예금반환청구권을 여전히 가집니다. 접근매체를 받은 사람은 그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뿐, 계좌에 입금된 예금 자체를 취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입니다.
따라서 피해금이 사기이용계좌로 송금되어 사기범이 인출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그 돈이 사기범에게 귀속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계좌명의인이 그 돈을 인출한 행위는 사기범에 대한 관계에서는 횡령죄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계좌명의인과 사기범 사이의 관계는 범죄에 이용되는 계좌를 둘러싼 관계이므로,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위탁관계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사기범을 피해자로 하는 횡령을 인정하면 범죄로 송금된 돈을 사기범에게 귀속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한계: 사기의 공범이라면 별도 횡령이 아닙니다
이 결론은 계좌명의인이 사기의 공범이 아닌 경우를 전제로 합니다.
계좌명의인이 사기에 가담한 공범이라면, 피해금을 보관하게 된 것은 자신이 참여한 사기 범행의 결과입니다. 그 뒤 인출은 사기 범행의 실행행위에 해당하므로, 사기죄 외에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가 별도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해당 판결에서도 사기 방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피해금 일부를 임의로 인출한 행위가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기 방조 부분은 계좌가 사기 범행에 이용될 것이라는 인식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 판단이 유지됐습니다.
판결의 결론은 유죄 확정이 아니라 파기환송입니다
이 사건에서 원심은 사기범을 피해자로 한 횡령 주장과 송금 피해자를 피해자로 한 횡령 주장을 모두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은 사기범을 피해자로 삼은 횡령 부분의 무죄 판단은 맞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송금 피해자를 피해자로 삼은 횡령 부분까지 무죄로 본 것은 위탁관계 법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횡령 부분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했습니다.
즉, 이 판결은 특정인에 대한 유죄를 확정한 판결이 아니라, 피해자를 기준으로 한 횡령죄 성립 가능성을 전제로 다시 판단하라고 한 판결입니다.
정리
사기에 쓰인 계좌의 명의인이 입금된 피해금을 인출했다고 해서, 사기범의 돈을 빼앗은 횡령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대법원 다수의견은 사기범에게 피해금이 귀속된 것이 아니고, 사기범과 계좌명의인 사이의 관계도 형법상 보호할 위탁관계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계좌명의인이 사기의 공범이 아니고, 피해자에게 반환해야 할 피해금을 영득할 의사로 인출한 경우라면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실제 성립 여부는 입금 경위, 사기 가담 여부, 인출 당시의 인식과 의사 등 구체적 사정에 따라 판단됩니다.
참고 법령·조문
- 형법 제355조 제1항
- 형법 제32조
- 형법 제347조
관련 판례
[1] 형법 제355조 제1항이 정한 횡령죄의 주체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라야 하고, 여기에서 보관이란 위탁관계에 의하여 재물을 점유하는 것을 뜻하므로 횡령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재물의 보관자와 재물의 소유자(또는 기타의 본권자) 사이에 위탁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위탁관계는 사실상의 관계에 있으면 충분하고 피고인이 반드시 민사상 계약의 당사자일 필요는 없다. 위탁관계는 사용대차·임대차·위임·임치 등의 계약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에 한하지 않고 사무관리와 같은 법률의 규정, 관습이나 조리 또는 신의성실의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