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준 통장에 들어온 피해금을 꺼내 쓰면 — 피해자에게는 횡령죄, 사기범에게는 아니다

입력 2026.10.28. 오전 10:08

사건의 배경: 대포통장과 피해금 인출

보이스피싱 사기에는 흔히 ‘대포통장’이 등장한다. 타인이 만든 통장의 카드나 통장을 사기범에게 넘기고, 사기범이 피해자로부터 돈을 받는 구조다. 그 뒤 통장을 빌려준 사람이 들어온 돈의 일부를 인출하는 경우도 있다.

대법원 2018. 7. 19. 선고 2017도17494 판결은 이 상황의 핵심 질문을 다룬다. 통장 명의인이 그 계좌로 송금된 피해금을 인출했을 때, 누구에 대해 횡령죄가 성립하는가 하는 문제다.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그 답은 사기에 가담했는지 여부, 돈을 받으려는 의도, 그리고 누가 피해자인지에 따라 갈린다.

핵심: 계좌에 들어온 돈에 대한 보관 관계

판례의 중심은 계좌명의인(통장을 빌려준 사람)과 피해자 사이에 위탁관계가 성립한다는 판단이다.

형법 제355조 제1항의 횡령죄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를 범주로 한다. 판례에 따르면 보관 관계는 계약으로만 생기지 않는다. 사실상의 위탁관계가 있으면 충분하다.

사기로 송금된 돈의 경우를 보자. 피해자와 계좌명의인 사이에는 처음부터 아무 계약도 없었다. 그런데 돈이 계좌에 들어온 순간, 상황이 바뀐다. 계좌명의인은 그 돈을 피해자에게 되돌려야 할 의무를 진다(민사적 부당이득반환책임). 즉, 계좌명의인이 피해자를 위해 그 돈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횡령죄의 구조인 위탁관계다.

언제 횡령죄가 되는가: ‘영득할 의사’로 인출할 때

단순히 계좌에 입금된 것만으로는 횡령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을 자기 것으로 만들 의사(영득할 의사)로 인출하는 행위다.

판례 사건에서 계좌명의인은 송금받은 돈 중 300만 원을 자신의 카드로 인출했다. 판례는 이를 영득할 의사가 있는 인출로 본 것이다. 만약 돈을 그대로 보관하기만 했거나, 사기범의 지시에 따라 다른 계좌로 옮기기만 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한계: 사기 공범이면 위탁관계 자체가 없다

다만 중대한 조건이 있다. 계좌명의인이 사기 범행에 공범으로 가담했다면, 피해자와의 위탁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공범이 자신이 저지른 범행의 결과로 들어온 돈을 인출하는 것은, 범행의 실행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익 침해가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사기에 가담한 계좌명의인의 인출은 사기죄만 성립하고 횡령죄는 추가로 성립하지 않는다. 판례는 “사기방조죄가 성립하지 않는 이상”이라는 표현으로 이 조건을 명시했다.

반대로, 계좌명의인이 사기에 무고했다면 피해자와의 위탁관계가 인정되므로, 영득할 의사로 인출했을 때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다.

사기범과의 관계: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

판례의 또 다른 핵심은 사기범(접근매체를 받아 실제로 계좌를 사용한 자)에 대해서는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돈의 귀속 문제. 통장을 빌려준다고 해서 그 계좌의 돈이 사기범에게 법적으로 귀속되지는 않는다. 계좌명의인이 은행에 대해 예금청구권을 가진다. 사기범은 접근매체를 받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지위일 뿐이다. 사기죄는 피해자 돈이 사기이용계좌로 송금되는 순간 기수에 이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돈이 사기범에게 귀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둘째, 보호할 만한 신뢰관계가 없다. 사기범이 제3자 명의 계좌를 이용하는 행위 자체가 범죄다. 계좌 사용도 사기 범행의 일부다. 이미 사기죄로 처벌되는 행위를 추가로 횡령죄로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다.

이 판결의 결론과 의의

이 사건은 파기환송으로 결론 지었다. 원심(고등법원)은 횡령죄를 모두 무죄로 봤지만, 대법원은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 부분이 법리 오해라고 판단했다. 사기방조죄 부분은 공소사실 인정을 탓하는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아 기각했다. 최종 유죄 여부는 환송된 원심에서 다시 판단하게 된다.

법원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별개의견(4인)은 접근매체를 받은 사람(사기범)에 대한 횡령죄는 성립하되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고, 반대의견(1인)은 어느 쪽에 대해서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따라서 이 분야의 법리는 앞으로 변할 여지가 있다.

현재의 판례에 따르면, 계좌를 빌려준 사람이 사기에 무고하면서 들어온 피해금을 영득할 의사로 인출했을 때,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최종 처벌 여부는 법원의 구체적 판단에 달려 있다.

참고 법령

  • 형법 제355조 제1항
  • 대법원 2018. 7. 19. 선고 2017도17494 판결

관련 법령: 형법 제355조

관련 판례

대법원 2017도17494 — 대법원 2018. 7. 19. 선고 2017도17494 판결

[1] 형법 제355조 제1항이 정한 횡령죄의 주체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라야 하고, 여기에서 보관이란 위탁관계에 의하여 재물을 점유하는 것을 뜻하므로 횡령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재물의 보관자와 재물의 소유자(또는 기타의 본권자) 사이에 위탁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위탁관계는 사실상의 관계에 있으면 충분하고 피고인이 반드시 민사상 계약의 당사자일 필요는 없다. 위탁관계는 사용대차·임대차·위임·임치 등의 계약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에 한하지 않고 사무관리와 같은 법률의 규정, 관습이나 조리 또는 신의성실의 원칙

판결문 원문 (2018-07-19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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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한 1차 출처

최종 확인일: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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