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여서 가져갔는데 왜 절도가 아니라 사기죄인가 — '처분행위'라는 판례 개념

입력 2026.10.01. 오전 10:08

“몰래 훔쳐간 것도 아니고 속여서 가져간 건데, 이건 사기가 아니라 절도 아닌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속여서 재물이나 이익을 얻었다면 원칙적으로 사기죄이고, 몰래 가져갔다면 절도죄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속였는가”가 아니라 “피해자 자신의 행위로 재산이 넘어갔는가”다. 이 기준점에 해당하는 것이 판례가 말하는 처분행위다. 다만 이 단어, 형법 조문 어디에도 없다.

1. 조문에는 ‘기망’과 ‘취득’만 있다

형법 제347조(사기)는 이렇게 정한다.

제347조(사기) ①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2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전항의 방법으로 제삼자로 하여금 재물의 교부를 받게 하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게 한 때에도 전항의 형과 같다.

조문을 그대로 읽으면 요건은 딱 두 가지, 기망과 취득뿐이다. “처분행위”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실무와 판례는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①기망행위 ②그로 인한 착오 ③착오에 따른 피해자의 처분행위 ④행위자의 취득, 이 네 요소가 순서대로 인과관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대법원이 이 네 단계 구성을 확립해 온 것이다.

절도죄는 형법 제329조에 따로 규정되어 있는데, 사기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 하나가 바로 이 처분행위의 유무다. 대법원 2017. 2. 16. 선고 2016도13362 판결은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처분행위는 행위자의 기망행위에 의한 피기망자의 착오와 행위자 등의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의 취득이라는 최종적 결과를 중간에서 매개·연결하는 한편, 착오에 빠진 피해자의 행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취득하는 것을 본질적 특성으로 하는 사기죄와 피해자의 행위에 의하지 아니하고 행위자가 탈취의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하는 절도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즉 재산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 그 재산을 움직인 것이 피해자 자신의 행위였는지가 갈림길이다. 피해자가 스스로 내주었다면(설령 속아서였더라도) 사기, 피해자 모르게 행위자가 가져갔다면 절도다. 같은 판결에서 반대의견도 이 구도 자체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절도는 범죄행위자의 탈취행위에 의하여 재물을 취득하는 것이고, 사기는 피해자의 처분행위에 의하여 재산을 취득하는 것”이라며 사기죄를 ‘자기손상범죄’, 절도죄를 ‘타인손상범죄’로 부른다.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이 갈리는 지점은 처분행위가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그 처분행위를 인정하기 위해 피해자가 무엇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가다.

2. “속아서 가져간 것을 몰랐다”는 두 가지 경우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눠보면 실제로는 상황이 두 가지로 갈린다.

(A) 피해자가 재산을 넘긴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경우 잠깐 구경하겠다며 물건을 건네받은 뒤 그대로 들고 가버리는 식이다. 이 경우 물건은 여전히 피해자의 점유 아래 있다고 보므로, 넘겨준 것이 아니라 ‘가져간’ 것에 가깝다. 2016도13362 판결의 반대의견은 이런 유형을 언급하며 절도죄로 처리해 온 기존 판례들을 예로 든다(대법원 1983. 2. 22. 선고 82도3115 판결, 대법원 1994. 8. 12. 선고 94도1487 판결). 다만 이 유형 자체가 이번 판결의 직접적인 쟁점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B) 서류에 서명·날인은 했지만 그 서류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몰랐던 경우 2016도13362 판결이 정면으로 다룬 쟁점이 바로 이것이다. 판결은 이를 ‘서명사취’ 사안이라고 부른다.

3. ‘서명사취’ 사건 — 몰랐어도 처분행위가 되는가

이 판결의 사안은, 피고인 등이 토지 소유자에게 “토지거래허가 등에 필요한 서류”라고 속여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등에 서명·날인을 받고 인감증명서를 교부받은 다음, 이를 이용해 토지에 근저당권을 설정하고 돈을 빌린 경우다. 원심은 “피해자들에게 그 소유 토지들에 근저당권 등을 설정하여 줄 의사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처분행위 자체가 없었다고 보아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이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심법원으로 환송했다(대법원이 직접 유죄를 선고하거나 형을 정한 것은 아니다).

다수의견 — 결과까지는 몰라도 된다

다수의견은 처분의사에 관해 이렇게 정리한다.

“피기망자가 처분행위의 의미나 내용을 인식하지 못하였더라도, 피기망자의 작위 또는 부작위가 직접 재산상 손해를 초래하는 재산적 처분행위로 평가되고, 이러한 작위 또는 부작위를 피기망자가 인식하고 한 것이라면 처분행위에 상응하는 처분의사는 인정된다.”

풀어 말하면, 착오에 빠진 피해자가 “어떤 행위를 한다는 인식”만 있으면 충분하고, 그 행위가 정확히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까지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서명사취 사안에 적용하면, 피해자가 문서의 구체적인 내용과 법적 효과는 몰랐더라도, “어떤 문서에 스스로 서명 또는 날인한다”는 사실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다면 처분의사가 인정된다.

다만 여기에는 빠뜨리면 안 되는 객관적 조건 두 가지가 함께 붙는다.

  • 그 작위·부작위가 직접 재산상 손해를 초래하는 처분행위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무 행위나 다 되는 게 아니다.
  • 의사무능력자의 행위나 무의식 상태에서 이루어진 행위는 애초에 처분행위가 될 수 없다. 결과를 몰라도 된다는 것이지, 행위 자체에 대한 인식조차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정리하면 다수의견의 입장은 “무엇에 서명하는지 전혀 몰랐으니 무조건 사기가 아니다”도 틀리고, “서명만 받으면 무조건 사기다”도 틀리다. 서명한다는 행위 자체는 인식했어야 하고, 그 서명이 재산상 손해로 직결되는 처분문서였어야 한다.

반대의견 — 결과를 몰랐다면 처분행위가 아니다

이 판결에는 대법관 6인의 반대의견이 있다. 반대의견은 처분의사가 인정되려면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까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재산적 처분행위나 그 요소로서의 처분의사가 존재하는지는 처분행위자인 피기망자의 입장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고, 피기망자가 문서의 내용에 관하여 기망당하여 그에 대한 아무런 인식 없이 행위자에 의해 제시된 서면에 서명·날인하였다면, 오히려 작성명의인인 피기망자의 의사에 반하는 문서가 작성된 것으로서 문서의 의미를 알지 못한 피기망자로서는 그 명의의 문서를 위조하는 범행에 이용당한 것일 뿐, 그 의사에 기한 처분행위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즉 반대의견에 따르면 이런 사안의 피해자는 사기죄의 피해자라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문서 위조 범행에 ‘도구’로 이용당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반대의견은 처분결과 인식이 필요 없다고 보면 사기죄와 절도죄(또는 다른 범죄)의 경계가 흐려지고 처벌 범위가 불명확하게 확대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로 지적한다.

중요한 점 — 이 반대의견은 판결의 다수의견이 아니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 채택된 것은 다수의견이고,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 기존 판례들(대법원 1987. 10. 26. 선고 87도1042 판결, 대법원 1999. 7. 9. 선고 99도1326 판결, 대법원 2011. 4. 14. 선고 2011도769 판결 등)은 이 판결과 배치되는 범위에서 변경되었다. 이 판례들이 통째로 폐기된 것은 아니고, 이번 판결과 어긋나는 부분만 변경된 것이다.

4. 그래서 “속여서 가져간 것”과 “속여서 몰래 가져간 것”은 다르다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 속여서 피해자 스스로 내주게 만든 경우 → 피해자의 행위(교부·서명 등)가 있었고 그것이 재산상 손해로 이어졌다면, 그 행위를 피해자가 인식하고 한 이상 처분행위·처분의사가 인정되어 사기죄다. 그 서류의 정확한 법적 효과까지 몰랐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2016도13362 판결 다수의견의 입장이다.
  • 피해자가 넘긴다는 인식조차 없이, 사실상 몰래 가져간 경우(전형적인 책략절도형) → 피해자의 처분행위 자체가 없다고 보아 절도죄 쪽으로 논의된다.

핵심은 “속였는가”가 아니라 “그 속임수의 결과로, 재산을 움직인 행위를 피해자 스스로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다. 서명사취처럼 서류에 도장을 찍게 만든 경우는, 서류의 구체적 내용을 몰랐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처분행위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 판결의 태도다.

참고 법령·판례

  • 형법 제13조
  • 형법 제329조 (절도)
  • 형법 제347조 제1항, 제2항 (사기)
  • 대법원 2017. 2. 16. 선고 2016도13362 판결

관련 법령: 형법 제347조

관련 판례

대법원 2016도13362 — 대법원 2017. 2. 16. 선고 2016도13362 판결

[1] [다수의견] 사기죄에서 처분행위는 행위자의 기망행위에 의한 피기망자의 착오와 행위자 등의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의 취득이라는 최종적 결과를 중간에서 매개·연결하는 한편, 착오에 빠진 피해자의 행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취득하는 것을 본질적 특성으로 하는 사기죄와 피해자의 행위에 의하지 아니하고 행위자가 탈취의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하는 절도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처분행위가 갖는 이러한 역할과 기능을 고려하면, 피기망자의 의사에 기초한 어떤 행위를 통해 행위자 등이 재물 또는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경우라

판결문 원문 (2017-02-16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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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확인일: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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